‘죽음’도 식사를 하나?
‘그녀’를 본 순간 ‘그’가 떠올린 것은 이 짧은 의문이었다.
얼마 전의 어수선함이 가시지 않은 파리의 한 노천식당에는 한 소녀가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긴 은발, 붉은빛을 띤 눈동자, 온통 검은빛을 띤 동양풍의 복식.
그리고 그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
그녀의 뒤에서는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웨이터가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그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빵, 감자튀김, 구운 새우, 스테이크 따위가 쉴 새 없이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볼이 미어지게 음식을 집어넣고 우물거리는 입에는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극권의 군주’는 그 모습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이야, 이 아가씨 정말 잘 먹는구먼! 지금까지 한 10인분 먹었나?”
“10인분 더 되죠. 우리 식당 메뉴판에 있는 거의 모든 메뉴를 지금 다 먹고 있는데… 힘을 쓰는 일이라 그런 걸까요? 클로저들 중에는 유달리 대식가가 많은 것 같더라고요.”
“그렇지? 아가씨, 모자라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아직 재료는 많으니까.”
소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정말?”
“그럼. 파리가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겼는데, 우리를 구해준 클로저에게 이 정도 보답은 당연하지.”
클로저라는 단어에 소녀의 미소가 의미심장하게 변했지만, 그녀는 곧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너무 잘 먹어서 미처 물어보지 못했는데, 음식은 입에 맞나?”
“응. 모든 음식이 정말 맛있어. 내가 태어나서 맛본 것 중 가장 맛있는 거야.”
“그래? 그거 다행이군! 어디 보자, 이번엔 뭘 내오면 좋을까… 아가씨 생선 좋아하나? 뫼니에르 먹어본 적 있어?”
다른 군주의 유희를 이 이상 엿볼 필요는 없을 터. 극권은 말없이 돌아섰다.
“어디 가?”
이미 늦었나. 극권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팔을 잡은 하얀 손을 내려다보았다.
“실례했군요. 당신의 여흥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럼 이만.”
극권의 쌀쌀맞은 말에도 가느다란 손가락들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담긴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같이 먹자.”
그러면서 소녀가 그의 팔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뜻밖의 제안에 극권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소녀의 얼굴을 한 번, 그녀가 있던 노천식당을 한 번 쳐다보았다.
대화 소리.
옷이며 가방이 스치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 식기가 달그락거리며 부딪히는 소리.
음식물을 씹고 삼키는 소리.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
소리, 소리, 소리…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코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에게는 최악의 장소였다.
“또 장난인가요? 지금은 어울려 줄 생각이 없습니다. 놓으시지요.”
“싫어.”
연홍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주변에 냉기가 서린 순간—
“어, 아가씨! 요리 나왔는데 거기서 뭐 해?”
극권은 흠칫하며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소녀가 그의 팔을 한 번 더 잡아끌었다.
“가자. 나도 그렇지만, 너도 오랜만에 다른 군주와 만난 거잖아? 다른 아이들은 저승에 아무도 놀러 오지 않고…….”
그녀의 말은 노인의 외로운 권유 같기도 했고, 어린아이의 철모르는 투정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언짢았지만, 그래도 이 ‘황천의 군주’라면 ‘위대한 의지’나 ‘몽환’보다는 나았다.
극권은 마지못해 황천이 이끄는 대로 발을 옮겼다.
***
거슬렸다.
모든 것이 거슬렸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음식을 먹는 소리.
음식이 조리되는 소리.
온갖 재료와 향신료가 뒤섞인 강한 냄새.
인간들의 불규칙한 움직임.
혼잡한 시선의 흐름.
쉴 새 없이 느껴지는 두 명의 힐끔거림.
불완전하고 경박한 질서.
거기에 한술 더 떠 그의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소음까지 있었다.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
극권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으흐흠, 으흐흠, 흠…”
‘오, 샹젤리제’ 뒤의 가사는 모르는 건지, 나머지는 죄다 허밍(humming)이었다.
음정은 비교적 정확했고 음색도 고왔지만, 극권에게는 그 어떤 노래도 불쾌한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인간들이라면 입을 얼어붙게 만들어 억지로라도 조용히 만들 수 있으련만, 현재 가장 끔찍한 소음을 내고 있는 존재는 그럴 수도 없으니 더욱 성가셨다.
“아, 이것도 맛있어! 뫼니에르? 아직 이 복잡한 맛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응, 이 맛 속에도 뭔가 중요한 감정이 숨어 있는 것 같아.”
“음? 감정? 맛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말고 다른 게 있나?”
황천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맛있게 만들어야 한다.’… 응, 그런 마음도 담길 수 있구나.”
“그렇지? 그런데 무기를 보아하니, 이쪽의 아가씨도 클로저지? 아가씨, 아가씨도 뭐 좀 먹을래? 저기 메뉴판에 있는 건 뭐든 시켜도 돼. 클로저에게는 모든 음식이 공짜니까 걱정하지 말고!”
‘쓸데없는 관심을…’
극권은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괜찮다. 신경 쓰지 말거라.”
“어? 왜? 점심 벌써 먹고 왔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 좀 먹어.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먹어도 돼. 이 아가씨도 그러고 있잖아? 자, 뭐든지 말해 봐!”
갈수록 태산이군. 극권은 신경질이 나는 것을 겨우 참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은 뭐라도 말해서 저 시끄러운 인간을 치워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식당에 그가 아는 음식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그는 ‘몸의 주인’의 기억을 뒤져, 겨우 떠오른 음식을 말했다.
“…그럼 아이스티를 한 잔.”
“아이스티? 정말 그거면 돼?”
극권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 이상은 권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식당 주인은 난처함이 섞인 어색한 표정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곧 아이스티가 담긴 커다란 유리컵이 그의 앞에 놓였다.
얼음이 가득 든 차가운 컵이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주었다.
극권은 컵에 입술을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윽…”
그는 얼굴을 확 찌푸렸다.
저급 홍차의 불쾌한 떫은맛.
떫은맛을 가리기 위한 설탕의 끈적한 단맛.
거기다 합성 착향료의 역겨운 복숭아향까지.
꽈직!
아이스티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면서 유리컵에 커다란 금이 갔다.
“어… 맛없어? 그럼 나한테 주지. 그것도 먹어본 적 없어서 궁금했는데.”
황천의 태평한 말에, 극권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아무리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인간과 다른 몸. 인간의 음식을 먹어도 영양분을 얻거나 포만감을 느끼지는 않을 텐데요?”
“그렇긴 해. 하지만 맛과 향은 느낄 수 있거든. 망자들의 기억 속에는 정말 수많은 먹거리가 존재하더라고. 그걸 보며 궁금해진 먹거리도 있고.”
“고작 그런 이유로 인간의 식사를…?”
황천은 조용히 웃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지. 사실 영양분이나 포만감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나는 음식을 통해 인간들이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는지 엿보는 게 즐거운 거야.”
극권의 얼굴에 미미한 의아함이 떠올랐다.
황천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인간들의 마지막 식사, 사형수의 마지막 만찬, 제사에서 올리는 음식들… 그것들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야. 그 안에는 그들의 기억, 그들의 갈망,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 그건 그들의 영혼이 내린 결단이 음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과도 같아. 나는 지금까지 무수한 망자들의 기억을 통해 그것을 봐왔어. 그래서 나는 인간들의 음식을 동경하고 좋아하게 된 거야. 실제로 먹어보니 맛도 좋고.”
말투는 여전히 가벼웠지만, 그녀의 말에는 깊은 무게감이 배어 있었다.
극권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리석군요. 감정이나 기억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불필요한 혼란일 뿐입니다.”
“왜? 나쁘지만은 않은걸? 나는 그런 감정과 기억이 좋아. 그걸 좋다고 느끼는 게,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니까. ‘그 아이’가 나를 바꿨어. 나는 이제 자아도, 의지도, 열망도 없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야.”
그 말을 하는 황천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생각 이상으로 긍정적인 반응에 극권은 조금 얼떨떨했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평정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한 인간 클로저와 만나 자아를 갖게 되었다고 했지요. ”
“응. 매일이 새로워. 매일이 기대돼.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나는 ‘죽음’이지만, ‘삶’이란 이런 느낌일지도 몰라. 이게 다 그 아이… ‘미래’와 만난 덕분이야.”
미래라면 용의 요람에서 그를 방해한 클로저 가운데 한 명이었던가.
그러고 보니 황천의 모습이 그 클로저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극권은 무언가 계산하듯이 황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황천이여. 모든 존재의 ‘끝’이여. 당신의 말씀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우리는 같은 집단에 소속된 인간들을 원하고 있는 것 같군요. 서로가 바라는 것을 위해, 손을 잡지 않겠습니까?”
디저트 접시로 나아가던 황천의 손이 멈칫했다.
극권은 계속 말했다.
“당신은 자아가 싹튼 후로, 여느 인간과 같은 혼란을 느끼고 있겠지요. 온갖 소란이 당신을 에워싸고 내면을 뒤흔들 터인데, 그것은 날이 갈수록 다스리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 무수한 소리는 결국 당신을 미치게 할 겁니다.”
황천은 마카롱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계속해서 그 소란을 견뎌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존재는 거기에 휩쓸려,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테지요. 그런 당신이 빠르고 효율적으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와의 협력이 필요할 겁니다.”
황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동맹을 제안하다니, 의외네. 너도 다른 아이들처럼 날 꺼리는 거 아니었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죽음’이란 곧 ‘완전한 침묵’. 제가 추구하는 ‘정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정적’이라.”
황천의 눈에 예리한 빛이 감돌았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너는 너 자신의 목소리는 괜찮은 거야?”
“그건…”
“네 백성들의 소리는 어때?”
정곡을 찔린 듯, 극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고요와 질서를 지키기 위한 방식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정숙하고 조화로운 상태. 내 목소리는 그것을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 그 자체로 소란이 아닙니다. 내 백성들은 그에 순응하며 안정적으로 살고 있었으니, 당신이 신경 쓸 바는 아닙니다.”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불편함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정적을 원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로 그 정적을 깨뜨리다니, 재미있네. 네가 정말 원하는 건 단지 네가 만든 규칙에 따르는 '조용한 순응'일 뿐이지, ‘진정한 정적’이 아니야. 모든 것이 조용한 질서를 원하면서 그 고요함을 계속해서 지배하려고 하니까,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소란이 되는 거지.”
황천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웃으며 덧붙였다.
“결국 너는 다른 존재들이 네가 만든 규칙에 따라 고요하게 있을 때만 평화를 느끼는 거지. 그 속에서 그들조차 네 목소리를 따르기를 강요하는 모순적인 존재인 셈이야.”
극권은 골치가 아팠다.
황천은 아까부터 한 마디도 지려고 들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질서를 유지할 겁니다. 고요와 정적이 내 세계를 정의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소란 속에 파묻힐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네가 추구하는 ‘정적’은 결국 너만을 위한 세계일 뿐, 다른 존재들에게는 그저 억압일지도 모르겠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세계에서 네 목소리만 계속 울려 퍼질 테니까. 그런 이기적인 아이와의 동맹이 제대로 될까?”
황천은 큭큭 웃으며 두 번째 마카롱을 물고는 고개를 저었다.
“응, 안 할래.”
역시나.
극권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아와 의지를 가진 죽음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루기 난감한 존재였다.
하지만 극권은 그녀의 태도에서 묻어나는 여유를 통해, 그녀가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보아하니 거절의 이유가 나의 태도뿐만은 아닌 것 같군요. 뭐죠?”
“내가 너와 다르기 때문이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정적 같은 게 아니라, 미래와 ‘하나가 되는’ 거야. 어차피 그 아이는 인간이니, 시간도 내 편이고.”
“하나가…”
극권은 그 표현을 천천히 되뇌다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얼어붙은 호수가 깨지듯이, 그는 평온한 내면에 서늘한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극권은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신은… 죽음을 넘은 존재를 원하는 거군요. ‘죽음의 죽음’, 당신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을 바라고 있어요. 그건 당신의 존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입니다.”
극권의 목소리는 드물게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황천은 마지막으로 남은 마카롱을 집어 먹으며 심드렁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명백히 아무 생각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당신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요? 당신은 지금도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만약 그 인간과 하나가 된다면, 당신은 정말로 더 이상 본질을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괜찮아.”
어떤 불안도, 주저도 없는 짧은 대답이었다. 극권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괜찮다고요?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부터 제대로 자각하시지요. 당신은 ‘죽음’. 모든 존재에게 냉정하고 공평하게 찾아오는 존재. 그런 당신이 자아를 가지고 제멋대로 굴 수는 없어요. 애초에 당신은 ‘당신’이어서는 안 됐던 겁니다.”
황천은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렸다.
“잔소리쟁이.”
더 이상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건가. 극권은 눈을 감았다.
길게 내뱉는 숨에 차가운 체념이 섞였다.
“가련하게도. 그 인간만 아니었더라면 당신은 훨씬 더 간단한 존재였을 텐데.”
그가 겨우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황천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흑립을 썼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극권은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식당을 나서는 황천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죠?”
“지금은 이 세상을 좀 더 둘러보고 싶어. 미래가 사는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그 아이도 나에 대한 거부감이 적어질지도 몰라. 그럼 언젠가는 나와 하나가 되어줄지도 모르지.”
황천은 키득키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
노랫소리가 멀어져 갔다.
“후…”
극권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각양각색의 소음에 너무 오래 노출된데다, 황천의 생각까지 겹친 탓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당장이라도 눈보라를 일으켜 이 시끄러운 거리를 영원토록 잠잠히 만들고 싶었지만, 지금은 화낼 기운조차도 없었다.
어디든 좋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하염없이 사색에 잠기고 싶었다.
그는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에 마지막으로 남은 인기척마저 사라지고, 오직 그의 발소리만이 남은 순간—
쩌적!
그의 등 뒤로 날아든 레이피어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헉…!”
레이피어를 쥔 자는 기겁을 하며 뒤로 크게 도약해 물러났다.
핸드가드에 가려진 그의 손은 어느새 시퍼렇게 얼어붙어 있었다.
극권은 습격자의 얼굴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는 극권이 황천을 따라 식당에 들어섰을 때, 그들을 연신 힐끔거리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여느 인간들과는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클로저였나.’
이를 악문 남자가 재차 덤벼들었다.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군. 그쪽은 황천에 붙었겠지.’
극권의 팔과 다리가 춤추듯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언뜻 느릿해 보이면서도 우아하게 움직이는 몸이 남자의 공격을 모두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필사적으로 공격하는 남자의 표정은 투지(鬪志)에서 점차 절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만.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구나.”
쩍!
극권의 냉정한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에 두꺼운 얼음이 덮였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얼어붙은 목구멍은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공포에 질린 푸른 눈동자가 무감정한 연홍색 눈동자와 만났다.
극권은 남자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저번부터 인간과 엮일 일이 어찌 이리도 많은지… 이것도 인간을 탐하게 된 자의 운명인가.’
그는 그 푸른 눈동자에서 한 소년을 떠올렸다.
‘검은양 연맹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인간들도 언젠가는 내 마음에 들 만한 소리를 들려줄 거라고?’
그는 아직도 ‘몽환’의 말을 전한 자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 ‘생명’의 소리가 골목길의 정적을 어지럽히며 극권의 귀에 시끄럽게 맴돌았다.
‘모르겠군.’
더 고민해 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리라. 극권은 몸을 돌렸다.
“얼음은 몇 시간 후 자연히 녹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원래의 소란스러운 너로 돌아가겠지.”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작은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인간 여인의 몸을 입은 극권의 군주의 모습은 어둠이 내리는 골목 사이로 얼음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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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데서 찾아보기 힘든 고퀄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