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ED BY MOMIMI
저수지의 수술일로부터 또 며칠 뒤. "임시지부장님, 몸은 괜찮으세요?" "네. 다만 마스테마에 기력을 많이 빼앗긴 탓에, 본격적인 업무를 보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요." 병상에 반쯤 앉아 기댄 김유정은 꼭 필요한 문서의 검토를 마무리했다. "그만큼 버틴 것도 용한게다. 검은양 아이들은 걱정말고, 네 회복에 집중하거라." "후훗. 그래요. 그래야겠죠." 그녀 앞에 앉아있던 남자는 위상력을 조작해 사과를 깎아줬다. 먹기 그렇게 과일을 예술품마냥 깎았지만 말이다... "뷜란트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이번 센텀시티에서의 일, 협력해주신 거에 대해 감사드려요." "딱히 감사받을 일은 아닌게다. 이 늙은이는 막바지에나 참여했고.... 그 아이들이 열심히 한 게지." 자온과 계약한 차원종-뷜란트는 평범하게 과일을 깎으며 답했다. 김유정 임시지부장의 초청으로 오세린과 함께 따로 그녀를 찾아 방문해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김유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세린 요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평범한 차원종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 강하시네요." "그야, 너희가 아는 평범한 차원종이라기엔 이 늙은이는 너무 늙었으니까. 허허허." "자아... 그럼 그만 돌려말하자꾸나. 이 늙은이에게 궁금한게 많지? 이 늙은이가 만전은 아니라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긴 하다만.... 말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다 얘기토록 하마." 김유정은 살짝 흠칫했다. 뷜란트의 말대로 오늘은 상부의 요청으로 자온과 그에 관한 걸 알아내고자 따로 부른 것이였다. 혹여 이심이 있을까 악의에 예민한 오세린 요원을 대동시킨 것이였지만... 묘하게 푸른빛을 띄는 저 회색 눈을 보면 그 속마음마저 다 꿰뚫려본 느낌이였다. "....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묻겠어요." 김유정은 사전에 준비해두었던 질문들을 묻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차원종들간의 관계, 아가와 함께 지난 시간까지... 그 중 대부분은 뷜란트가 대답하지 못하는 민감한 내용들이라 쉬이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성실하게 대답하며 문답을 주고받았다. "...네. 준비한 문답은 여기까지예요. 고생하셨어요." "아니다. 오히려 대답하지 못하는게 많아 미안하구나." "그래도 이 정도면 상부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답변인걸요. 그럼 이제부턴... 조금 개인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사항을 몇 가지 물어도 될까요?" 뷜란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김유정은 바로 질문했다. "이번 자온 씨의 교전 기록 중에, 잠시였지만 볼프강 요원님과 파이 요원님의 무장이 갑자기 통제를 벗어난 공격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혹시, 그 무장들에 아시는 게 있을까요?" "볼프강과 파이라.... 아. 맹목과 극권에게 눈독잡힌 아이들 말하는 게구나. 아마 아가가 흘리던 내 힘에 감응해 반응한 걸게다. 딱히 적의만 흘리지 않는다면, 같은 일은 없을 게야." "맹목과 극권..." 깨어난 이후, 김유정은 '어떤 인물'에게 연락을 받아 몇 가지 정보를 받았었다. 그 중에서는 볼프강의 무장인 [검은책]과 파이의 [사검]에 과한 정보가, [맹목]과 [극권]에 관한 정보도 일부 정리되어 있었다. 짧은 생각 끝에, 김유정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정확히, 그들은 어떤 존재인가요?" "어떤 존재냐...." 뷜란트는 생각을 정리하는지 의자를 앞뒤로 흔들거리며 팔짱을 끼었다. "....그 둘은 나와 동격인 존재인게야. 너희가 군단장이라 부르는 이들의 부모 격.... 최상위, 그마저 초월해버린 존재라고 부르는 것이 좋으려나." "관계로는 맹목과는 다소 교류한 편이였다만.... 그 친구는 과거 큰 죄를 저질러 육신을 잃었지. 극권과는 이념이 맞질 않아 좋은 사이는 아니다만.... 극권은 현재 내 본체처럼 유폐되었다고 들은 적 있는게야." "더 이상 말하자니 과거 아는 것은 내가 답할 수 있는게 한정되어있고, 내가 유폐된 이후의 일은 아는 게 많지 않아 답하기 어렵겠구나." "....네. 답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다음으로는... 이번 자온 씨의 진료 기록을 확인했더니, 평범한 위상능력자의 몇배는 넘는... 저희 측의 트레이너 씨보다도 더 높은 근밀도의 다리 근력을 보유하고 계시더군요." "아, 그거? 이 늙은이도 조금 놀랄 정도로 강력하긴 하더구나." "네. 이번 전투에서 정말 큰 힘이 되어줬죠. 그런데..... 이전 자온 씨의 신체 데이터를 보면 출력과 근밀도, 양측 다 이전의 1/10도 안 되는 수치였어요. 혹시 어떤 육체적 변형 같은 걸 따로 도와주신 건가요?" "아니. 그건, 본디 아가의 타고난 육체인게야." "타고...났다고요?" "그 이전 수치. 아가는 어릴 적에, 폐와 다리에 아주 고약한 짓을 당했단다." "아폴리온.... 아바돈 말씀이시죠?"
과거 부산을 지옥으로 만든 아바돈의 얘기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 세린 아가씨 말대로 그의 독에 아가의 폐와 다리는 제 빛을 잃은게야. 온전하지 못한 나와의 계약, 거기에 흉진지 너무 오래인지라 힘을 얻고도 다 회복이 불가능해서 고통은 없애고, 남들 움직이는 수준 정도로 상시 회복하는 것이 고작이였지." "허나. 치밀히 짜인 필연과, 타인을 구하고자 하는 선의의 우연이 겹쳤고, 아가는 육체에 남아있던 흉을 지울 기회를 받았단다." 비운은 자온이 사라질 것에 대비해 미래의 인과를 설계하고, 능력을 준비해 두었다. 아무것도 모른채로 그저 저수지를 구하고자 했던 선의로 자온은 그가 준비해둔 능력을 사용했다. 필연적으로 받은 패널티로 거의 소멸했었던 그의 육신은 비운이 안배해둔 능력으로 다시 회복되었고, 그 과정에서 남아있던 독의 잔재는 모두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렇게 자온은, 본디 가졌어야할 육신을 되찾았던 것이였다. '이것까지 편히 털어놓으면 속이 시원하련만....' 막상 현실은, 제약에 의해 말할 수가 없어서 두루뭉실하게 얘기한 것이 다였다. 어중간한 대답에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할 거라고 예감한 김유정은 다른 질문을 바로 건넸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을게요. 뷜란트 씨와 자온 씨는 계약을 통해 힘을 나누셨다고 하셨죠?" "그랬지." "그럼 자온 씨는 반은 차원종, 반은 인간이라는 뜻인데... 이것도 맞나요?" "아까 공적 질문에서 묻지 않았더냐? 그래, 맞다. 스스로 차원종의 비율을 조절 가능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이걸 묻는 이유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저는 그런 존재들을 몇 봐온적이 있어요. 인간의 제 2위상력과, 차원종의 제 1위상력을 모두 가져.... 제 3위상력이란 힘을 다루는 자들이였죠. 뷜란트 씨도 이번 싸움에서도 보신 적 있을 거예요." "....아. 그 호프만이란 자 말이구나." "네. 그 두 힘이 반발하며 생기는 그 힘은 양측의 힘을 어느 정도 무력화시키는데다, 강력한 힘을 발하는게 특징이죠." "문제는 너무나도 강한 힘에 육체나 정신, 어느 쪽이건 오래 버틸 수 없어요. 안정화한 사례도 있지만.... 호프만이 했던 것처럼 대부분 편법이거나, 아주 찰나만 사용할 수 있거나, 아니면 차원종의 육체를 받아들인 후에나 가능했어요. 그만큼 눈에 띄는 힘이죠." "그런데 오세린 요원님께 받은 자료를 확인했을 땐.... 자온 씨가 차원종의 육체를 발현시켰을 때에도, 강한 힘을 발현시킨 때에도...." "단 한번도, 제 3위상력 특유의 파장이 전혀 검출된 적이 없어요." "아... 그렇네요..! S급 차원종이였던 아스타로트나, 검은양 팀이 그를 처치했을 때 사용했던 그런 파장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요." "분명 서로의 힘과 육체가 섞였다고 하셨죠? 그런데 어째서.... 자온 씨는 제 3위상력을 다룬 적이 없는거죠?" "호오....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가는 제 3위상력을 쓸 수 없단다. 아니, 애당초 제 3위상력 자체를 발현한 적이 없지. 아가는 제 1위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네....?" "너희는 이 늙은이까지 포함해 통틀어 차원종이라 부르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들과 나는 다르다. 너희가 인류라는 종으로 포괄하여도, 너희도 조금씩 다르지 않느냐?" "차원종도, 수많은 종들이 있다. 너희를 침략하는 차원종...[이름 없는 군단]. 침묵을 존중하는 [극권의 백성]. 수많은 지식을 탐하는 [맹목의 사서] 등.... 셀 수 없을 만큼의 종(種)이 있지. 다만.... 그 중에서도 이 늙은이는, 아주 조금 특별하단다." "특별.... 하다고요?" "그래. 늙은이는.... 근원에 가장 가까운 힘을 타고났단다. 나의 권능과 힘은 그 세상에 맞춰 적응하고 변화하며, 침식하지. 내 힘을 너희가 부르는 명칭을 따와 부른다면.... 그래. 제 0위상력 이라 부르는게 맞겠구나." "힘의 근원.... 제 0위상력....?!" "특별하다면 특별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런 힘이란다. 그저 세상에 맞춰 자연스레 변화할 뿐인 힘. 그렇기에 제 1도, 제 2도, 제 3의 힘을 닮을지언정, 그들 특유의 힘은 가지지 못 한단다. 아가가 제 3의 힘 특유의 폭발적인 강함을 가지지 않은 연유지." "그래도, 단 하나는 단언할 수 있단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 힘은 한계란 없단다. 그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으며, 그 무엇도 될 수 있단다. 그것의 원동력은 오로지 마음. 그렇기에 반드시....." 더 말하려던 뷜란트의 입이 제약으로 막혀 뻐끔거렸다. 더 말할 수 없음을 알고선 김유정은 이 이상 묻기를 그만두었다. "...네.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명쾌히 답도 주지 못했는데 몸도 좋지 않은 이에게 너무 시간을 빼앗았구나..... 아?" 뷜란트가 갑자기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세린 아가씨, 지금 시간이 몇 시더냐!?" "네? 지금.... 아... 아앗!!" 시간을 확인한 오세린과 뷜란트가 허겁지겁 자리를 일어섰다. "죄송해요, 임시지부장님! 정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일어나볼게요!" "나중에 또 궁금한 거 있으면 답하러 오마! 그럼!" "아. 네, 네...! 그럼 나중에 뵐...."
후웅----
뷜란트는 오세린을 업고선 순식간에 자리를 떠났다. 김유정은 침상에 다시 기대며 들은 자료를 정리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이건 또, 상부에 어떻게 보고해야할지.... 하.... 딱 한잔만 마시고 싶다..." 또 다시 아무에게나 함부로 알리지 못할 것을 짐작하며 아까보다도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무슨 약속이시길래 급하게 가신 거지?"
****** "아가들!!! 안 늦었지?" "괜찮다. 늦지 않았다." "늦을 뻔 했지만 말이죠." "어쨌든, 다 모였으니 이제 가볼까요?" "자, 잠시만요.... 속이...." 초가속만큼은 아니였지만 워낙 빠른 속도로 질주해 온 탓인지 오세린이 벤치에 기대 끙끙 거렸다.
****** "이 길로 가면 돼?" "네. 외길이니까 쭉 올라가면 돼요." "그런데... 자온 씨는 왜 여기 와 달라고 하셨을까요?" 그 날 오전, 자온은 시궁쥐 팀원들과 오세린, 민수현에게 정해진 시각에 다같이 와달라는 요청을 했고, 그들은 시간에 맞춰 다함께 그가 지정한 위치로 향하고 있었다. "글쎄요. 뷜란트 씨는 뭔가 짐작가는 게 없으신가요?" "글쎄다..... 아. 아니. 알겠다. 이제야 뭘 하려는지 알겠구나." "그래요? 뭔데요?" "이 늙은이 입은 가볍다만... 이건 말하면 아가가 정말 화낼테니 그때까진 침묵하마." "하아....? 영감님, 비밀 만들고 장난질하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 몰라요?" "아무리 궁금해도 협박은 아니잖아요, 은하 씨?!" "하하하하하.... 차라리 손모가지 날아가는 게 나을게야. 이번은 진심으로 화낼테니 말이다." "으, 은하 씨! 다 왔으니까 이제 물어보면 되요!" "...명령이예요, 보스?" "네, 네! 명령이예요!" "...알겠어요. 가서 물어볼게요." 그렇게 몇 분 더 올라가 도착한 곳은,
쏴아아아..... 쏴아아아아....
석양에 반사된 부서지는 파도가 보석처럼 빨갛게 반짝이는 절경이 한 눈에 보이는... 단애(斷崖)였다. "왔어?" 그곳에서 자온은 예전처럼 편하게 풀어헤친 와이셔츠의 소매를 매만지며 기다리고 있었다. "예쁘지? 오랜만이라 여기도 없어졌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대로더라?" "...응. 예뻐." "아름답긴 하다만... 여긴 네게 있어서 특별한 곳인가, 자온?" "....아주 옛날에, 병원에서 막 퇴원해서 신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병원 밖을 막 나오고서, 형님이 여기 데려와주신 곳이야."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파도가 붉게 반짝이던 이 모습을. 그 붉은 태양에 반사돼 더 붉게 타오르던.... 형님의 그 모습도." 단애의 끝자락을 걸으며, 아무것도 몰라 어리석고, 순수했던 과거를 추억했다. 이 반짝이는 파도를 보며, 당신은 어떤 생각이셨을까. 나 대신 살고싶지 않으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알 수 없지만.... 그 말만은, 기억한다. "형님은 그날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셨어." "죽는다면, 이 바다에 묻히고 싶다고. 고향 바다에 섞여... 영원토록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으시다고..." "역시.... 여기가 아가 네가 처음 오고자 했던 곳이구나." 영감의 말대로... 여기가 내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처음 목적지로 설정했던 곳이였다. 좌표가 뒤틀려 전혀 다른 곳에 도착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더 소중한 너희를 만났으니까." "가, 갑자기 뭐라는 거야...!?" "히힛. 영감!" "그래, 그래." 뷜란트는 옆에 공간을 뚫더니, 그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꽃?" 아주 많은, 꽃더미였다. "부탁했더니 아주 덮어놨네, 덮어놨어." "가져왔기에 해주었더니 해줘도 뭐라는구나. 그래도 부탁한 것엔 문제 없단다." "그래야지." 자온이 꽃더미를 몇번 쓱 걷자. 그 속에서 수의(壽衣)를 정갈하게 입은 채 잠든 남자가 나타났다. "이 분은...?" 모두가 어딘가 낯익은 남자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석양 빛을 받아 더 붉게 타오르는 붉은 머리칼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닮았다. "자온 형이랑.... 많이 닮았어요." "이 남자는 설마....!" "...비운. 자온 씨의... 형이세요....!" 남자는, 10여년 전 사망했다고 알려진 비운이였다. "말했죠? 외부차원으로 떨어졌을 때, 형님의 시신과 함께 떨어졌다고. 그 뒤로 영감에게 부탁해서... 형님의 유해가 부패하지 않도록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했죠. 관도 부탁하긴 했지만.... 꽃관은 생각도 못 했지만." "꽃관이 뭐 어때서 그렇느냐? 예쁘기만 하구만." "그래. 잘 보존해줘서 고마워." "그나저나.... 미숙 언니한테 듣기했지만...." "응? 형님이 왜?" "진짜, 잘생기긴 했네요." "김철수도 상당한 미형인 편인데... 정말, 잘생기긴 했네요." "잘생겼다는 건 잘 모르겠지만.... 예쁘게 생겼어." "....못 바꾸겠지?" "뭘 바꾼다고!?" "칫." "칫? 치이이잇!??" 나와 형님을 번갈아 보던 은하가 혀를 찼다. 설마, 이런 식으로 동료들에게 뼈맞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에휴.... "....그럼 이제, 본론을 말해야겠지." 일어나 뒤돌아 본 자온은 모두에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클로저 비운의 마지막에 와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원래는 조용히 보내드릴 예정이었지만.... 제가 정말 신뢰하는 여러분을, 형님께 마지막으로 인사드리고 싶다는 욕심으로 불렀습니다." "....!" "원래는 나이트도, 미숙 누님도, 수호 형님도. 부르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더라, 형." "형. 원래는 말이야, 형 복수에 눈이 멀어서 그냥 평생 혼자 떠돌거였거든? 그런데 우연히 잘못 떨어져서... 저 녀석들을,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서... 너무 소중해진 내 사람들을, 당신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었어요." 자온은 비운의 유해 앞에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는, 한명한명 손짓으로 부르며 비운에게 소개를 시켜주었다. "미래. 제가 만난 가장 순수하고, 선한 친구예요." "김철수. 과묵해보여도, 다정하고 든든한 친구예요." "민수현. 민수호라고 기억하시죠? 그 분의 동생이예요. 아끼는 동생이기도 하고요." "오세린 요원님. 제가 지금 몸담고 있는 클로저 팀을 맡아주시는, 믿음직스럽고 강한 분이세요." "루시. 처음 잘못 떨어진 곳에서 만난, 제 첫 친구예요. 루시에겐 항상, 기운을 얻고 있어요." "은하. 루시랑 같이 처음 만난 제 친구예요. 저 자주 괴롭혀요..... 풋. 진담이긴 한데, 좋은. 정말 좋은 친구예요." 은하가 자리를 비키고서,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비밀인데... 좋아하는 사람이예요. 친구로 말고요." [태양]의 감정이 섞여서 그렇다고 억지로 외면해왔지만, 솔직해지기로 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 나쁜 척하면서 착해 빠진 그녀를... 훗. 이 마음 자체는, 좀 더 숨길 거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자리엔 없지만.... 저희에게 항상 용기를 주는 저수지란 친구도 있고, 지켜주고 싶었던 활기찬 아이도 있었고요, 그리고 많은 사람을 지키겠다고 다시 마음을 건네준.... 소중한 친구도 있었어요." 투둑 비운의 얼굴 위로, 자온의 눈물이 떨어졌다. "아, 제일.... 중요한 걸 말 안 했네. 형. 아직 임시이긴 한데, 나 클로저 됐다? 아직 미숙하지만 형님이 바랬던 것처럼 사람들을... 우선으로 지키는 그런, 클로저가...."
딱! 손가락을 튕기며, 염화를 일으켰다. "수호 형님께 부탁드렸어. 합동 분향소와 별개로, 이번 일로 희생당한 분들의 위령비를 여기 세워달라고. 그리고 그 한 구석을 빌려서.... 형님의 묘비로 같이 써 달라고." "...10년 전에 하지 못한 그 말을, 이제 할게." "이런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나의 태양. 나의 하늘..." "좋은, 여행을." 화륵!
화아아아아아악......!
비운을 담은 꽃관이 불타 흩날리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방금까지도 내륙을 향해 불던 바람이 바다를 향해 불어 잿가루를 바다에 널리 퍼트리기 시작했다. 비운이 바랬던 것처럼 먼 바다까지 널리..... 널리..... "....어?" 순간, 루시는 뭔가 잘못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비비기 전과 똑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자온의 곁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 "잘못 보이는 게, 아닌 건가?" "아니예요. 제 눈에도 보이는 걸요...? 누군가가....!" 그 순간, 그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석양을 받아 더 붉게 타오르는 머리칼과 그 머리칼보다도, 하물며 태양보다도 더 붉게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가 그들과 시선을 교차했다. "저 사람은.....!"
남자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지을 뿐. 모두가 눈을 깜빡인 순간, 그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후우-----" 나는 마지막 잿가루까지 모두 바다에 보내고 뒤를 돌았다. 그런데.... 어째 모두의 표정이 이상했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귀신이라도 봤어?" "....풋. 그래, 귀신 봤다. 무진장 잘생긴 귀신이더라. 너랑 바꾸고 싶게 말이지." "그 드립 끝난 거 아니였어?!" 소란 속에서, 모두 웃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조용히 약속했다. 당신의 동생과, 끝까지 함께 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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