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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슈나이더] 왜 하필 당신일까 작성일2024.12.23 조회698

작성자애쿼머린

※ 순례자의 언덕 에픽 스토리 스포일러 존재

※ 241213 writing

 

 

 

 

 

 -주니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 왜 이름인 ‘볼프강’도 아니고 애칭인 ‘볼프’도 아닌 ‘주니어’라는 단순한 단어에 반응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 볼프강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니 바로 보인 것은 살짝 열린 창문으로 인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결에 따라 흩날리고 있는 고급 원단의 커튼 자락과 커튼 자락에 희미한 그림자를 만드는 느지막한 오후의 햇살. 그리고 그 앞에 한 폭의 그림마냥 놓인 – 어째선지 볼프강은 그 의자와 탁상이 유독 자신에게는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의자 두 개와 탁상 하나. 그 탁상 위에 놓인 건 찻주전자와 찻잔 단 두 개뿐으로, 어린 아이가 좋아하는 다과만 없을 뿐이지 차에 대해 문외한 사람이 보더라도 어느 누군가가 티타임을 즐기고자 차린 찻상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를 보자마자 볼프강은 두 가지 감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들었다. 첫째는 불쾌함이었다. 볼프강이 알고 있는 지인들 중에 저런 간략한, 오롯이 차(茶)만을 즐기고자 하는 찻상을 차릴 만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명에게 볼프강이 가지고 있는 감정은 결코 좋지 못하였다.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기억은 거의 없었고, 그마저도 길이길이 추억하고 싶지도 않은 불쾌한 경험들뿐이었으니까.

   

 둘째는 경악이었다. 볼프강은 앞선 ‘그 사람’에 대한 감정과 무관하게,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이 결코 ‘지금 시간대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그 사람’…… 볼프강의 아버지인 레온 슈나이더와 저런 식의 티타임을 가졌던 적은 지금의 볼프강에게 있어서 약 십 수 년 전의 일이었다. 누구나 반항기가 찾아온다는 시절부터 볼프강은 자신의 아버지와 저런 찻상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아예 대화 같은 것도 섞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볼프강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일련의 일은 전부 최소 십 수 년 전의 볼프강이 직접 겪었을 법한 일이라는 것인데.

   

 혹여나 싶어 볼프강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투박한 성인 남성의 손이 아닌, 이제 막 젖살이 빠지기 시작한 듯한 어린아이의 손이 보였다.

   

 자신이 불렀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볼프강에게 레온 슈나이더는 다소 강압적인 목소리로 그를 한 차례 더 불렀다.

   

 -뭐하고 있는 게냐, 주니어.

   

 그제야 볼프강은 깨달았다.

   

 -이리로 오래도.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일을 볼프강은 이미 오래 전에 한 번 겪었다는 것을. 그리고 시간을 역행하게 되었다는 전제를 빼고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은 바로.

   

 ‘꿈이군.’

   

 그랬다. 볼프강 슈나이더는 지금 자신이 어렸을 때의 일을 꿈으로 꾸고 있었다.

   

   

   

   

   

 ‘왜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꿈이라는 걸 자각하고 나서도 볼프강의 기분은 최악을 넘어 나락으로 향하고 있었다. 볼프강은 힐끔 자신과 나란히 마주보며 앉아있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꼬장꼬장한 노인네까지는 아니었다. 지금 볼프강의 기억 속에 있는 레온 슈나이더는 성공한 중년 교수의 표본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그런 얼굴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확실히 더 들어 보이는 아버지를 보고서 볼프강은 도리어 안도하고 있었다.

   

 그래, 이게 옳은 아버지와 자식의 얼굴이다. 볼프강은 레온 슈나이더의 입장에선 다소 늦둥이였다. 그러다 보니 나이 차이가 보통의 부자(父子)보다는 더 있어서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언뜻 보면 할아버지와 손주로 볼 수도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이었는데.

   

 볼프강은 괜히 울컥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건 볼프강의 꿈속이다. 그러니 마음대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건 볼프강 뿐, 볼프강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중년의 슈나이더 교수는 그렇지 못했다.

   

 -주니어, 불만이 있는 게냐?

   

 이 시기의 볼프강은 불만이 있으면 꼭 고개를 숙이는 식으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기에, 슈나이더 교수는 그걸 근거로 볼프강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볼프강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왜, 이런 건 쓰잘데기 없이 구체적으로 잘 표현한 거냐고.

   

 이 꿈에서 또 쓰잘데기 없이 잘 표현해둔 건 하나 더 있었다.

   

 방금 전, 자신과 차를 마시자며 볼프강을 부른 슈나이더 교수는 어린 아이 몸에는 높기만 한 의자에 볼프강이 올라가지 못하자, 직접 올려주었다. 조심히 안아서 올려준다는 느낌보다는 짐짝마냥 취급되어 올라가는 느낌이었지만 볼프강은 이거에서마저도 그리움을 느껴 울컥할 뻔 했다.

   

 여기서부터 위험했는데, 자신보다 확실히 나이가 든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니, 지금 ‘현재의 아버지’가 떠올라가지고 이제는 거의 한계에 가까웠다. 빨리 이 꿈에서 깨고 싶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깨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다. 보통 이렇게 꿈을 꾸고 있는 술자가 꿈을 꾸고 있다고 의식하는 것을 ‘자각몽’이라고 했던가.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 이 꿈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 터. 스위치라던가, 아니면 특정 행위라던가. 그걸 이제 어디서 찾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볼프강의 귀로 슈나이더 교수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부터 한 달 정도 집을 비울 것 같구나.

 -…….

 -어쩌면 두 달이 될 수도 있겠고.

   

 볼프강의 의사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제야 볼프강은 지금 자신이 꾸고 있는 꿈의 대략적인 시기까지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아플 때는 일에 바쁘다며 거의 집에 돌아오지도 않았던 아버지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몇 달에 한 번씩은 독일로 돌아와 자신과 며칠 정도는 같이 지내줬던 시기. 그러나 며칠 같이 있다고 해서 부자의 정(情) 따위는 절대로 쌓이지도 않았던 시기. 이에 진절머리가 난 볼프강이 먼저 슈나이더 교수를 피하기 시작했고, 이에 응하듯 슈나이더 교수도 볼프강에게 딱히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하던 시기.

   

 레온 슈나이더는 자신의 아들인 볼프강 슈나이더에게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분명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진심을 알지 말 걸 그랬다. 차라리 끝까지 오해하고 있었으면 ‘그 사람’이 그렇게 된 지금이라고 하더라도, 도리어 마음이 좀 더 후련했을지도 모른다. 아주 가끔씩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아버지 역할 좀 하라며 더 고집스럽게 굴지 못한 과거의 나날이나 후회하면서.

   

 아니면 차라리 지금 이렇게 어린 자신과 아버지가 차를 마시고 있는 꿈을 꿈이라고 의식하지 말 걸 그랬다. 그러면 이 꿈에서 깬 직후에 ‘아, xx 꿈’이라면서 반나절 정도만 기분이 나쁘다가 끝날 일이었을 것인데.

   

 그런데 이렇게 자고 있는 와중에도 생각이 많아지면……. 하루 종일 저기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쉬는 볼프강을 슬쩍 쳐다본 레온 슈나이더는 거의 마시지 않는 볼프강의 홍차 앞으로 무언가를 슬쩍 건넸다. 찻주전자보다는 부피가 얇은 주전자에는 분명 우유가 가득 들어있을 것이다.

   

 볼프강은 그 주전자를 보자 흐릿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볼프강의 아버지, 레온 슈나이더는 홍차를 즐겨 마시는 고풍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자신의 기호를 아들도 이해해줬으면 해서 어린 시절에는 자주 차를 같이 마셨었다. 부자 관계가 아직 최악으로 치닫기 전 – 볼프강의 어머니가 살아있던 시절 – 하루는 볼프강이 아버지가 마시는 걸 따라 마시겠다고 오기를 부린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입맛에 맞은 떫은 홍차는 어린 볼프강에게는 – 물론 지금 볼프강도 그렇지만 – 무척이나 이상한 맛이었다. 괜히 자신의 앞에 주워진 홍차를 완식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울상을 짓던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슈나이더 교수는 우유를 섞어 밀크티로 마시는 게 어떠냐고 했었다. 그리고 직접 자신이 우유를 가져와 볼프강의 입맛에 맞는 밀크티를 만들어 주었더랬다. 그 후로 볼프강이 자신과 홍차를 마실 때 떫은맛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아무 말 없이 우유가 담긴 주전자를 슬쩍 볼프강의 앞에 주었더랬다. 가끔은 그 주전자는 우유가 아닌 각설탕이 담긴 병일 때도 있었지만. 각설탕인 날에 슈나이더 교수는 유독 엄격했다. 설탕은 몸에 안 좋으니 너무 달게만 마시지 말라나 뭐라나. 어떤 날은 달달한 다과만 가져와서 볼프강에게 먹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 또한 단 건 몸에 안 좋으니 적당히 먹으라는 훈수를 하면서 말이다.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한참 전부터 잊고 있었던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볼프강을 덮쳤다.

   

 ‘……미치겠군.’

   

 어린 시절 레온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들과 관련되어, 그 언덕에서 레옹이 자신에게 했던 그 말들이 왜 또 쓸데없이 ‘같이’ 떠오르는 건지…….

   

 -다과도 있으니 같이 드세요.

 -떫으신가요? 그럼 우유를 넣어 밀크티로 드실래요?

   

 기억의 대부분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홍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떫은 홍차가 싫다’는 반응에 당연히 우유를 넣어서 마실 거냐고 물어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데 왜 그게, 하필이면…….

   

 “당신인 거냐고.”

   

 볼프강은 처음으로 꿈속에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슈나이더 교수는 무표정도 아닌, 엷은 미소를 볼프강에게 지을 뿐이었다.

   

 꿈이라서 그런가? 그 얼굴로 답지 않은 표정을 짓네. 아니, 내가 보고 싶었던 당신의 얼굴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던 걸까.

   

 볼프강은 재차 응어리를 토해냈다.

   

 “왜 하필……! 당신이었던 거냐고…….”

   

 답을 해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이건 볼프강의 꿈이니까. 볼프강은 아직도 자신의 아버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면 마음으로는 쉽게 이입이 되지 않는다고나 할까.

   

 “아버지, 내가 재밌는 사실 알려줄까?”

   

 이런 진심, 자신도 아버지한테 직접 말해주는 게 좋았을 것이라며 막연히 또 후회하였다.

   

 “난 아버지가 그렇게나 싫었는데, 당신이 좋아하는 홍차 취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떫은맛이 어떤 비율로 나야하는지도.”

   

 쳐다보니 슈나이더 교수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웃고만 있을 뿐이다.

   

 그 조각상 같은 움직임에 볼프강은 이곳이 재차 꿈인 것에 슬퍼하였다.

   

 “왜 그럴까…….”

   

 왜 나는 당신을 생각 이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걸까. 이런 걸로, 당신을 온전히 기억해서는 안 되는데 말이야.

   

 원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기로 한다. 이번만큼은. 그 말은 즉, 또 다음이 있길 바란다. 그리고 그때는…….

   

 “그러니 가끔씩은 꿈속에서 나타나줘. 어머니랑 같이 나타나도 되니까.”

   

 ……그랬으면 좋겠다. 홀로 있는 ‘아버지’도 이제 허상이라고 한다면 꿈속에서라도 두 분이 함께 계시는 것을 보고 싶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잠들기 직전 보았던 천장 무늬가 볼프강을 반겼다.

   

 지독할 정도로 슬프고 행복한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런 꿈은 또 처음이라 너무 무섭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아직 새벽이라 어두컴컴한 방 안이 도리어 반갑게만 느껴졌다.

   

 볼프강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밤은 더 자기는 이제 글렀다고.

   

   

   

   

   

 “볼프강 요원님,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다음날, 레옹이 얼굴이 흙빛인 볼프강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당연한 것이다만 어째서인지 볼프강은 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또 당신인 걸까.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별 거 아니야. 잠을 좀 설쳐서 그래.”

 “잠을 설치셨다고요? 혹시 잠자리가 불편하셨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볼프강은 어쩐지 레옹에게는 적당히 둘러대는 게 영 힘들었다.

   

 “꿈을 꿨을 뿐이야.”

 “혹시 그 꿈이 악몽이었던 건가요?”

 “왜, 그런 사소한 것도 궁금해? 별일이네.”

   

 볼프강의 농에 레옹은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분한 표정으로 볼프강에게 소리쳤다.

   

 “당연히 걱정이 되니까 그러지요!”

 “……걱정이 된다고?”

   

 정말, 왜 하필 당신인 걸까. 다른 사람이 하면 사소할 뿐인 행동임에도 괜히 더 의식하게 만드는…….

   

 그리고 이럴 때의 볼프강 슈나이더는 어린 아이 가릴 것 없이 짓궂어지는 사람이었다.

   

 “그거 혹시, 유니온 소속의 사람이라서야, 아니면…….”

 “……네?”

 “아니, 아니야. 그나저나 대단한 걸. 견습요원이라고 들었는데 벌써부터 실무 적응부터 하려고 하는 게.”

 “언젠가 클로저분들께 한 사람으로서의 보탬이 되고 싶으니까요.”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할 필요는 이제 없어. 당신은 이미……. 아니, 아니다. 말을 말자. 안 하는 게 낫다고 다들 판단한 것에 나 혼자 반기를 들 수는 없으니까.

   

 레옹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같이 홍차 드실래요?”

 “그래, 그러지. 오늘은 밀크티로 마셔볼까나.”

 “어? 마음이 바뀌셨나요? 항상 싫어하시는 듯 하면서도 떫게만 드시더니.”

 “오늘은 그런 기분이야. 단 걸 먹고 싶은 기분.”

   

 잠이 부족해서 그런가. 볼프강은 그렇게 적당한 핑계를 댔다.


댓글1

0/200

  • kinjoukaede

    ㅠㅠㅠㅠ

    2024.12.23
창작 게시판
BEST
바이올렛[3]
...